神들의 땅
이종목
전시기간 : 2025. 5. 23 ~ 6. 12
신촌로 129, 아트레온 B2
작가 노트
해도 구름도 달도 마당 바윗돌도 저 앞 푸른 산도 오월의 물기둥과 불기둥으로... 모두가 그렇게 너울너울 춤추듯 노래하듯 흘러간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그리고 비스듬히 서로의 몸을 뒤집으며 모두가 태초의 몸짓으로 흐른다. 오직 인간만이 분주하다(2025.5.10.).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리는 힘이 있다. 온몸으로만 느껴지는 이끌리는 힘이 분명 있다. 내 스스로가 수없이 쌓아온 업력이기도 할 것이다(2025.5.7.).
오월 산은 사월 산과는 또 사뭇 다르다. 잎들이 제법 자란 오월 산은 날씨는 물론 바람의 방향이나 속도에 따라서도 산색이 변화무쌍이다. 센 바람이 휘 한 번 불면 순간 잎들이 뒤집어지며 바람을 따라 허이옇게 바람길을 낸다. 물이 한껏 팽팽하게 오른 나무들이 계절의 극양 불기운이 불어올 때마다 몸을 연신 뒤집으며 하늘과 땅을 뒤섞는다(2025.5.6.).
20여 년 전부터 ‘神들의 땅’이란 제목의 그림들을 그려왔고 지금도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경덕진에서 제작한 천여 개가 넘는 陶彫印들도 실상은 신들의 땅을 형상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무릇 생명의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신의 숨결이므로 이 땅은 바로 그러한 신들의 땅이라는 것, 그리고 구원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광야에서 부르는 순례자의 노래는 오염된 신들의 땅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2025.4.28.).
작품
이종목_神들의 땅-광야를 지나며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28×128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광야를 지나며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28×128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광야를 지나며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광야를 지나며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94×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62×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62×130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이종목_神들의 땅-순례자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7×91cm_2025
평론글
<이종목의 작품세계>
심미를 반영한 지적이고 세련된 운필의 묘
신항섭(미술평론가)
조형적인 요소 가운데 점과 선과 면은 회화의 출발점이자 완결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장악하면 구태여 색채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능히 아름다운 조형세계를 펼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이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점과 선과 면에 대한 이해 및 숙지는 그림의 기초일 뿐이라며 일축한다. 과연 그럴까. 문화의 흐름이 동진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수묵을 매개로 하는 선의 미학이 각광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이종목은 이 세 가지 조형적인 요소를 근간으로 하여 필묵의 현대적인 변용을 모색한다. 다시 말해 점과 선과 면에 대한 투철한 이해 및 연구를 통해 품격 높고 아름다운 조형언어를 탐색한다. 자유로우면서도 생기 넘치는 필선의 유희를 지향하는 그의 작업을 보면 왜 선의 표현에 천착하는지 알 수 있다. 세련된 필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 그 전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선 그 자체만으로도 회화의 본질을 갈파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구사하는 필선은 회화의 본령을 장악하겠다는 의지 및 신념에 의해 이끌린다. 특히 최근의 철판을 재료로 하는 일련의 작업에서 보여주는 강직하면서도 기운찬 필세는 새삼 선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선이야말로 여전히 회화의 본질을 갈파하는데 아주 긴요한 수단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 그의 작업은 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구극의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구체적인 형상과 더불어 비구상, 그리고 순수 추상의 영역을 오가면서 실체로서의 선을 궁구하는 그의 작업은 이 시대에 희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기교적인 화려한 수사학 또는 현란한 채색에 현혹된 나머지 선의 순수성을 탐구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그의 작업은 고독한 등불이나 다름없다. 선의 미적 가치를 탐닉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를 역행하는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고도로 정련된 방식에 의해 주조되는 선의 순수태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각별하다.
그의 작업은 순수한 선의 다채로운 변주라는 방식으로 고상하고도 차원 높은 조형미를 추구한다. 그 필선에는 해맑은 정신이 기거함으로써 숙련되고 세련된 선의 정령이 현현한다. 그가 구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선은 타고난 감각의 결과이든 오랜 모색의 결과이든 능히 탐미적인 시각을 유인할 만하다. 구체적인 형태를 빌어 나타나는 선보다는 비구상 또는 추상적인 성향일 때 더욱 감각적이고 세련된 모양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성향의 선은 지적 성찰을 유도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지적인 세련미를 갖춘 선은 그 무엇을 형용하더라도 시각적인 쾌감과 더불어 지적인 희열을 지속시키는 힘을 용출한다. 단출하면서도 투박하고 힘찬 기세를 보여주는 선은 탐미적인 시각에 진솔하게 응답한다. 단지 필묵의 선만으로 탐미적인 시각을 압도하는 수많은 동양의 명화들을 교조로 삼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명화들의 참 가치를 탐닉하는 심미안의 소산이다.
최근 작업 가운데 놀랄만한 성과물은 다름 아닌 철판을 이용하는 입체작업이다. 수묵작업을 해온 그에게 철판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이질적인 재료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차갑고 무거울뿐더러 강직한 금속성 재료인 철판이 그의 직관력과 조형감각에 의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보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철판이 가지고 있는 금속으로서의 물질적인 특성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만 세련된 수묵의 선과 같은 이미지가 실체적으로 떠오른다. 마치 공중부양과 같은 방식으로 수묵의 선이 돌연 종이라는 평면공간을 벗어나 입체적인 실제공간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필묵의 선이 입체공간으로 떠올랐을 때 수묵작업과는 전혀 다른 감흥 및 형태미와 마주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필묵의 공간이동이야말로 새로운 미적 체험이자 시각적인 충격이다. 필묵의 선이 관념의 형상이었다면 철판을 통해 구체화되는 선은 현실공간에 떠오른 실상이다. 실질적인 체적을 가진 물질로서의 선의 형상은 이렇듯이 예상치 못한 조형적인 변신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실상으로 변환하는 필묵의 선에서 느끼는 감동의 진폭은 관념의 상에서 느끼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이다. 평면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 뛰쳐나와 실체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조형적인 과정은 실로 파격적이고 감동적이다. 이런 생소한 시각적인 체험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예술가적인 명민한 감수성 및 지적인 탐구의 소산일 따름이다. 즉, 선에 대한 집중된 사색과 더불어 직관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근래에 이런 순수한 선의 미를 추구하는 작가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유별하다. 그 선에는 관념의 그림자와 더불어 자연미에 합당한 순수성, 그리고 지적인 세련미가 함께 한다. 이 세 가지가 교묘히 어우러져 시각적인 아름다움 또는 미적 쾌감을 조성한다. 무엇보다도 철판이라는 재료를 통해 변환하는 수묵의 선이야말로 그가 강구해온 관념의 세계를 현실적인 상과 일치시키는 순수한 조형의 결실이지 싶다. 짙은 관념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선의 기세는 다름 아닌 기운생동의 현현임을 웅변하기에 그렇다.
철판이라는 새로운 재질로 변환하는 수묵의 필선은 오랜 각고의 산물이다. 오직 물상의 본태를 꿰뚫는 힘을 축적하는데 전념해온 수묵의 행로는 그에 상응한 격조 높은 세련된 선으로 보상받고 있다. 비구상의 형태로 제시되는 필선과 그 상은 탓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인상이다. 군더더기가 없고 오직 명징할 뿐이어서 시각적인 인상이 명료하고 담박하다. 그러면서도 결코 경직되거나 차갑지 않다. 설령 철판이 아닌 다른 재료일지라도 선의 기세는 조금도 변치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그 선은 그만큼 투철하게 손과 몸에 익힌 기술이자 감각인 까닭이다.
그의 선은 단순히 필묵에 의한 운필의 습득 및 운용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기세가 강하고 명료한 선의 모양새는 돌이라는 재료와 맞서는 전각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예리한 칼끝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각의 명징한 선은 부드러운 운필의 효과와는 다르다. 단숨에 끊어내듯 예리한 선의 모양새야말로 전각에서 길들여진 감각의 영향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철판작업 또한 전각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전각의 기술 및 재료에 의해 익힌 예리한 선의 감각이 철판이라는 재료로 이행한다는 것은 결코 생뚱한 발상이 아니다.
선에 대한 감각은 이렇듯이 단순히 필묵으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재료, 다른 형태의 글씨쓰기나 드로잉을 통해서도 선의 감각을 익힐 수 있다. 다른 형태의 재료로 익힌 선일일지라도 필묵을 운용하는 가운데 은연중 묻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전각에서 익힌 선의 감각이 필묵의 선에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필선이 드러내는 담대하고 강직하며 강건한 기세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작업은 오랜 필묵의 운용 그 연장선상에 있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양해온 그의 작업은 필묵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다. 구체적인 형태묘사를 포함하여 비구상 또는 추상의 경계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필묵의 유희를 즐기는 까닭이다. 항시 열린 미의식으로 세상과 마주함으로써 경직되거나 편향되거나 주저하는 바가 없다. 어떤 형태의 상에도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의 수묵작업은 최소한의 형상을 거느리면서 가능한 한 자연스럽고도 명료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달고자 한다. 애매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절제한다. 그러기에 파묵이나 발묵, 적묵과 같은 표현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선묘방식, 즉 이미지를 형용하는 데는 필선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수묵작업에서는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필선의 응용이 보다 자유롭게 전개된다. 특히 중봉을 비롯하여 측필, 역필 등 다양한 필법을 구사함으로써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처럼 자유로운 필선에 의한 이미지와 함께 전각에 의한 갖가지 형상이 함께 한다. 다시 말해 돌에 새긴 인물, 호랑이, 거북이, 봉황, 물고기 등의 이미지를 도입한다. 이들 형상을 각인 기법으로 찍어내는 종이작업은 전통적인 문양 및 민화적인 요소와 결탁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적인 성과를 얻고 있다. 부드러운 모필의 필선과는 확실히 다른 감각이다. 이들 전각의 이미지는 색채물감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다. 따라서 수묵과 색채 이미지, 필선과 판화가 양립하는 상황인데도 결코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이미지가 교묘히 조화를 이룬다. 예리한 칼끝이 만들어내는 판화의 선과 강건하고 명료한 수묵의 필선의 동거는 기묘한 시각적인 감흥을 유도한다.
이와 같은 형식의 작업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여러 소재를 하나의 공간에 수용하여 그 전체적인 조화를 모색하는 구성이 돋보인다. 기존의 조형개념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세상을 전개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형태의 물상이 함께 해도 그저 조화로울 뿐인 대자연의 질서를 좇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자연스러움, 즉 인위성을 소거한 듯싶은 자연미야말로 그의 조형세계가 추구하는 이상인지 모른다. 설령 그것이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된 이미지일지언정 신체적인 기술을 과시하거나 감정 표현이 넘치는 일은 없다. 신체적인 힘과 내적인 욕망의 영역을 벗어나 자유롭고도 자연스러운 표현을 지향한 결과이다. 되도록 인위적인 흔적을 덜어낸, 자연에 필적하는 표현이야말로 그 자신의 심미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퐁투스 키안더(Pontus Kyander)_미술평론가
통상,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은 지면으로 떨어지게 되고, 우거진 관목들 아래 무성히 쌓이게 된다. 새들이 부리를 열고 난후, 그들의 지저귐은 저 멀리 나무들 너머로 사라지며, 구름 속 비는 조용히 흩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생각해 보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난 후 놀란 새가 부리를 열기 시작하는 곳.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비가 아닌, 구름 속을 찾아 거꾸로 올라가는 비가 내리는 곳, 지면에서 나뭇가지를 향해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곳. 이곳에서는 무질서가 질서를 앞서고, 침묵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이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창조의 순간인 것이다.
태초에 세상에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실, 침묵도 존재하였다. 모든 것을 규정짓고 이론화하는 언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결국 언어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과 무질서가 가득한 세상을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어떠한 메아리도 울리지 않고, 그래서 어떤 결과도 생겨날 수 없었던 세상. 이곳에서 빛과 어둠은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균열이 되고난 후, 이 세상은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소리는 침묵에서 해방되었으며, 빛은 어둠에서 벗어났다.
이종목의 회화는 질서가 생기기 전의 상태에서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 상태는 아직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상징과 언어가 있는 곳이며, 법칙이 정해지지 않았고, 자유로움이 존재한다.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잎사귀들이 지면이 아닌, 나뭇가지로 떨어지고, 소리가 그 진원지를 찾아나서는 순간이다.
의미를 찾아가는 기호들, 질서를 찾으려 하는 무질서. 이것이 이종목 회화의 순간이다. 이는 유동성이 있는, 변화할 수 있는 세상이며, 안정과 질서가 생기기 전이다. 그래서 이종목 작품에서는 흥겨움이 존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업은 규칙이 아직 존재하지 않은 곳이며, 모든 것들이 각각의 가능성과 변화 가능한 의미, 역할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이종목이 익혀왔던 전통, 즉 한국화에서 예술을 끌어안는 철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종목의 붓은 자유로우며, 그의 눈은 감겨있다. 마치 그의 기호들을 느슨히 풀어주고, 의미를 향해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