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작가 후원전
- 2부 -
B1. 이수진 - 대식가 소식가
B2. 권윤지 - Melancholy and Catharsis
2023. 2. 22 ~ 3.7
전시 작품
1이수진_먹다_화선지에 먹_116x91cm_2023
이수진_多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일립(一 粒)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多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일립(一 粒)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多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일립(一 粒)_화선지에 먹_163x130cm_2023
이수진_動_화선지에 먹_45x480cm_2023
이수진_多_화선지에 먹_116x91cm_2023
이수진_一粒(일립)_화선지에 먹_116x91cm_2023
이수진_ㅇ_화선지에 먹_53x72cm_2023
이수진_多多多多多_화선지에 먹,금박_40cm_2023
이수진_깨작깨작_화선지에 먹,금박_30cm_2023
권윤지_능청맞은 강아지_53x45.5cm_캔버스에 유화_2023
권윤지_노부의 바이올린_90.9x72.7cm_캔버스에 아크릴_2023
권윤지_제주 해안도로 아래에서_130.3x193.9cm_캔버스에 아크릴과 유화물감_2023
권윤지_앵무새 죽이기_65.1x53cm_캔버스에 아크릴_2023
권윤지_신들의 식사_162.2x130.3cm_캔버스에 아크릴_2023
권윤지_야산 위의 소나무들_145.5x112.1cm_캔버스에 유화_2021-2023
이수진 작가노트
대중 소비사회 속 음식의 가치, 오늘날 ‘먹는다’의 의미는 단순히 허기를 채운다는 개념을 넘어선다. 음식은 위로와 안식의 개념으로 자리 잡으며 현대인의 헛헛함을 달래 주지만, 먹방, 쿡방 일명 대식좌, 소식좌 까지 새로운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 하는 삶 속에 먹는다는 행위는 어딘가 쓸쓸하다.
수많은 음식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고, 진실한 맛은 느낄 수 없다. 가볍게 먹어도 무겁고, 무겁게 먹어도 가벼워진다.
위안과 대리만족으로 허기짐을 달래는 욕망조차 허기로 남는다.
현대사회 속 먹는다는 의미, 그리고 대식가와 소식가의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一粒一粒安可輕) ‘어찌 한알 한알 가볍게 여기겠는가’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 신곡행 《햅쌀의 노래》의 한 구절이다.
봇물이 터진 오늘날의 음식 풍속화를 빗대어 이야기 해본다. 점점 복잡해지는 일상, 이럴 때 일수록 ‘가장 단순한 것이 주는 힘이 있다’ 라는 생각을 한다. 다식(多食), 소식(小食) 하며 우리가 안녕하길 바란다.
음식의 포르노로 전락한 지금, 그것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권윤지 작가노트
그림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첫맛은 그저 어떤 평면 이미지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림과 만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건' 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림은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겪어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림의 물성에 담긴 작가의 총체적 흔적을 빨아들이는 경험을 회화 경험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그리고 시각을 넘어선 복합적인 것인지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림이 갖고 있는 본원적 힘은, 형식적 구분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에, 작가의 창의성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게 화론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저만의 결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 노력의 전과정과 그때 그때의 개별적 작품들 속에, 또 작품들의 하모니 속에 제 작품세계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감성은 예술 창작을 통해 최고도로 활동하고, 그 활동성은 세상에 새로운 감성의 영토를 개척하며, 집단 무의식 속에 어떤 고유한 범주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평면은 감옥이고 우주이며, 저만의 은유와 상징의 텃밭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저는, 작가로서 제 기본기를 충실하게 보여주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저는 예감하였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제 그림 역시 그러한데, 저는 점차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 고지에 이른다면 저는 무엇을 그리든 -심지어 아무 것이나 그리더라도- 먼지 한 톨, 삶의 작은 한 조각을 통해서도 제 전부를 내보일 수 있게 되리라, 그런 기대는 그 자체로서 확신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데에는 몽상이 필요하고, 도취와 연민, 조형적 사치도 필요합니다.
이번 전시는 꽤나 화려하고, 제 세대의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적 무게감이 넘칩니다.
어쩌면 조잡한 작품들을 통해, 저는 현재의 열정을 증언하고 있으며, 응원하고 함께 가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제 이상적 그리기를 향해 가는 길의 솔직한 풍경 구석구석을 속이지 않고 내비치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명작들이, 또 제가 발견한 기법들이 저를 매혹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아무런 기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림에 기대하는 것은 늘 명확하였습니다.
그것은 치유라면 치유고, 삶에 대한 통찰이라면 통찰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통하지 않고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쩜 우린, 깊은 곳에서 그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환영과 실재의 경계가 사라진 화면 위에서 눈은 놀고, 관객의 발과 화가의 발은 흰 갤러리에서 또 더러운 작업실에서, 스텝을 밟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다만 '계속 그리는 것'입니다.
순수회화, 또는 회화의 순수성에 대한 저의 열심에 힘을 실어주세요.
미술가의 삶은 단 한 가닥의 실마리만 있으면 살아진다는 것을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