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생각들


권 기 동

전시기간 : 2023. 10. 21 ~ 11. 10

신촌로 129, 아트레온 B1,2 

작가 노트


  

삶의 대부분을 서울의 동쪽에서 살았다. 

언젠가 까까머리 중학생이 걷던 길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걷는다. 

걷는 사람도 변해가고 익숙했던 제기동 골목길도 변해간다…그리고 사라진다.  

풍경은 변한다. 지워지는 풍경은 우리가 무엇이 되어 왔는가를 보여 주는 살아있는 화석, 집단 기억의 중추이다. 기억 또한 견고하지 않다. 때때로 현재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따라 이동하고 변화한다. 풍경과 공동체의 기억은 분리할 수 없다. 공동체 자체가 풍경을 만드는 힘이다.

풍경은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며 관찰자가 필요하다. 인간의 시선이 덧씌워진 프레임화된 이미지는 때때로 공동체의 희망과 상실, 믿음과 함께 한다. 오늘의 풍경을 만들어 낸 동력은 결핍의 공동체가 가졌던 뜨거운 열망, 집단적 욕망의 끝없는 순환이다. 욕망은 타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완벽한 타자로 등장한 서구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투사한 대상이다. 욕망의 대상을 향한 질주와 도달 불가능한 미끄러짐의 반복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하고 자꾸만 지연되는 연기와 유예의 이미지이다. 욕망의 본질은 충족이 아닌 불만족의 지속이다. 작가의 시선은 마침표가 불가능한, 완결되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더듬거리는 문장과도 같은 풍경 위를 선회한다.                     

   작가가 목격한 풍경은 슈퍼모더니티가 작동하는 욕망과 고독의 모습이다. 장소이면서 장소가 아닌 곳이 있다. 관계와 기억은 증발하고 무심한 익명의 시선만이 통과하는 도시 한 복판, 상상과 현실이 교차한다. 이 공간은 우리 삶에 은밀하게 스며드는 불가해한 공백 같다. 서로를 복제하며 증식하는 테마파크와 메가 쇼핑몰은 도시에 도래한 낙원일지도 모른다. 철저한 익명성과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이 공간은 구매 가능한 쾌락의 환상과 함께 우리를 자기 기만적 만족으로 천천히 마비시킨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조우하게 되는 이 섬뜩한 기시감은 장소의 기억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 화가는 때로는 탐정처럼, 때로는 해독자로 변신하며 그곳에 드리워진 의미들을 읽어낸다. 어느 날 문득 마주치는 이 섬뜩한 데자뷰(Déjà-vu)의 환상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평론글


  

포스트모던 풍경: 역사 밖으로 미끄러진 시공간의 재현


정현(미술평론, 인하대학교 교수)



“이러한 의미에서는 ‘역사’가 물화되고 파편화되며 제조되어-내파되는 동시에 고갈되어-나타난다(승리자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을 무단삭제한 역사). 그 결과는 역사의 대리물, 표준적인 동시에 정신분열적인 대리물이다.”*


현대 도시란 19세기 말 근대를 지배한 과학기술적 가치관으로 세워진 세계이다. 그래서 도시는 생산과 소비의 논리를 중심으로 배치되었고 현대인은 이 틀 안에서 일과 일상을 분배하고 조절한다. 휴식과 레저라는 개념도 촘촘히 박혀있다. 역사를 상징하는 기념물과 그 주변에는 기념품과 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정교하게 조경된 공원 등이 위치하기 마련이다. 현실은 이데올로기나 종교와 같은 유토피아를 향한 믿음으로 세워진 연극무대와 같은 허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도시는 인간의 열망, 잦은 실망과 패배감이 뒤엉켜 만들어진 복합적인 인공 세계로 진화 중이다. 현실의 세계는 생존이라는 필요와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신화적인 허구들의 혼합체인 셈이다. 그렇게 동시대 도시는 시대, 가치, 취향, 양식 등이 혼재하는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변모 중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이념은 세계의 도시들을 경쟁의 장으로 끌어들여 장소가 가진 기억도 상처도 모두 지워버리거나 추상화한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수직으로 높게 솟은 기념비로 지우고 그 고통과 상처를 뒤로 한 채 반짝이는 차가운 재료를 사용하여 투명하지만 절대 그 속을 볼 수 없는 건축물로 대신하는 게 바로 성공과 발전이란 이상을 추구하는 도시의 미학이다.


기시감의 장면들


권기동이 드린 도시풍경에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불분명하다. 분명,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소이지만, 막상 그곳이 어디인지, 언제인지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작업의 대상이자 주제인 장소는 원거리에서 보는 거대한 풍경이 아닌 근거리에서 보는 한 장면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대상들이 특정한 사건이나 역사적 의미와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와 달리 특정한 정체성 자체가 아예 부재하는 장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즉 역사도 기억도(그래서 미래도) 없을 법한 이 파생실재(시뮬라크르)들은 그래서 더욱 문제적이다. 흔히 클리셰라 불리는 몰개성적인 건축양식과 지나치게 직설적이기에 외설스럽게 보이는 조형물과 화려한 네온사인 등은 반짝일수록 되레 초라함이 더 부풀어지기 마련이다. 권기동이 주로 그리는 이러한 장소들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담고 있는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할 포스터(Hall Poster)는 포스트모던 미술과 건축이 여러 시대의 양식들의 파편들로 조합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혼성모방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러니까 혼성모방의 현장은 상투화된 양식과 시간축이 해체된 상태를 암시하는 약호들이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포스터는 화가들이 이러한 약호들을 이용하여 “과거를 광고처럼 즐기는 방식인 소비하기 쉬운 이미지를 생산하거나 양식적 참조에 탐닉”**하는 현상을 적시하고 비판했다.


요컨대, 권기동의 회화는 포스터가 비판하는 그 지점에서 작업이 출발한다. 시기에 따라 비판적 태도의 강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영웅을 생각하다> 연작(2005)과 같이 역사를 구성하는 상징물을 직접적으로 다뤘던 경우도 있지만, 그의 작업 전반을 지배하는 태도는 탈역사적인 장소, 역사로서의 과거가 아닌 시대적으로 퇴행했거나 만약에 현재라는 시간의 기준점이 있다면 거기로부터 뒤로 물러난 장소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근작 중 하나인 종암동의 한 상업 건물을 살펴보자(<일요일 아침-종암동>, 2017). 권기동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서 아마도 1980년대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을 주목한다. 작업 과정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상호들이 바뀌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변화를 그림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의 회화에서 유독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시간의 지연’이다. 그는 동일한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한다. 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사진적 충동과는 달리 한 장소에서의 여러 시간들이 한 화면 안에 중첩된다. 건물 파사드에 붙은 상호들만 읽어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한 평면에 패치워크 되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처럼 권기동은 주로 백화점, 쇼핑몰, 놀이동산 등 인공적으로 역사나 영화 속 장면들을 재현한 장소 혹은 미국의 하이웨이에서 만날 수 있는 1960년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과 이러한 문화적 약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공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역사와 내러티브가 희미한 장소들을 재현한다. <에어 쿨드 2>(2017)는 미국의 상징적 하이웨이 루트66(Route 66)을 대표하는 호텔 비일(Hotel Beal)을 재현한다. 1899년에 지어진 호텔 비일은 이미 운영이 중단된 상태로 현재는 역사적 기념물 또는 실존이 없는 과거의 흔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두 개의 화면을 가득 채운 건물은 실제로는 원래 호텔을 반복적으로 재현한 결과이다.


혼성모방 풍경: 지연된 시간의 재현


낡은 회전목마, 초라한 마릴린 먼로 장식물, 투박한 60년대 미국 자동차, 흔하디 흔해진 프랜차이즈 상점과 맥없이 건물 위에 매달려 있는 슈퍼 히어로 조형물 등은 미국 대중문화의 익숙한 기호들이다. 작가가 미국 유학을 한 점도 이러한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1970~80년대 한국 미디어를 장악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 서부영화가 보여준 스펙터클과 자동차, 비행기, 고속도로, 마릴린 먼로, 햄버거, 소다, 로큰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슈퍼맨은 아메리칸 드림을 대표하는 표상이자 냉전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상징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유토피아의 상징들은 실현되지 않았고 냉전 이후 더 이상 현실에서의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문화산업에 의하여 생산된 이러한 산물들은 2000년 전후 사이에 쇠락하거나 소멸된다. 발터 벤야민은 대량생산된 근대적 산물을 두고 정신적 가치가 부재하는 사치품이라며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자문하곤 했다. 1980년 중반 이후, 미국을 표상하는 대중문화의 상징물들이 서서히 한국문화 속으로 이식되기 시작한다. 강남개발과 더불어 서울 근교에 유원지, 고급식당 등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주말 교외 나들이 문화가 자리 잡는다. 이 과정에서 주말 외출을 책임지는 도시 근교의 상업 건축 양식이 필요했고, 토속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대중성과 이국성이 혼합된 혼성모방양식이 자생하게 된다. 이러한 혼성모방양식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적 기반과 결탁하여 영혼도 정신도 없는 파생실재들이 과거의 것과 미래를 꿈꾸는 이상적인 것들 사이에 기생하게 된다. 


권기동은 이처럼 시간의 축과 문화적 맥락을 상실한 상태에서 생존하는 장소를 재현한다. 당연히 약간의 노스탤지어가 잠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축이 무너지고 지켜야 할 것과 버려도 되는 것의 선택 사이에서 과거도 미래도 예측할 수 없던 시기에 생성된 역사의 미아와 같은 이러한 양식들은 가치도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생존의 시간이 지연된 문명의 일부이다. 유적이 될 만큼 고고학적 가치가 부재하는 이 같은 장소들은 그렇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일까? 혼성모방은 유럽중심의 지배적인 역사주의에서 미끄러져 나타난 뿌리도 역사도 원형도 없는 시뮬라크르의 집합체이다. 그러니까 원형이 부재하는 일종의 허구인 혼성모방은 도피적인 환상을 보여준 세계, 허나 현재는 현실로 진입하지 못한 채 과거에 머문 장소, 혹은 최근 한국의 하위문화로 대표되는 오타쿠 현상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혼성모방이 갖는 성격은 권기동 회화의 양식적 특성과도 조우한다. 그것은 의도적인 어색함 내지는 키치적인 정서라 부를 수 있겠다. 유물이 되지 못한 철지난 사물들이 모이는 곳은 다름 아닌 벼룩시장이다. 그곳엔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가 모이지만 막상 쓸모 있는 게 모인 곳은 아니다. 바로 시간이 지연된 장소, 박물관이나 역사현장이 주는 긴장감과 무게에서 벗어난 곳이 바로 벼룩시장이다. 그곳엔 아직 박물이 될 수 없는 상태의 사물들, 큰 의미나 역사적 가치가 부여되지 못한, 다시 말하자면 역사가 될 수 없고 제도의 프레임에 속하지 않는 형상들이 모인 곳이다. 그렇다고 권기동이 포스트모던 미학을 추구하는 화가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해체하고 파편화하기보다는 동시간/동시대란 표준화된 시간-어쩌면 권력화된 시간-에서 비껴나 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흔적들을 회화적 재현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다.


* 할 포스터, 미술.스펙터클.문화정치(경성대학교 출판부, 2012),pp.225-226
**위의 책, p.55.




작품




주식회사 아트레온 / 아트센터 / email_우석뮤지엄: thopy2@hanmail.net | 아트레온갤러리: kis3021a@hanmail.net / 연락처: 02-364-8900  FAX. 02-364-0707 / 

사업자번호: 111-81-01744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129 아트레온 12F 사무실 / 5F 우석뮤지엄 / B1, B2 아트레온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