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道, 삶의 길을 말하다
우석 최규명 又石 崔圭明
전시기간 : 2025. 2. 26 ~ 3. 15
신촌로 129, 아트레온 B1,2
<기획취지>
전시를 열며_우석 글씨와 삶
박종숙_우석뮤지엄 실장
우석 선생에게 글씨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 전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석 선생은 1919년 개성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대외활동에 바빴던 선대인先大人은 선생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 자금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우석 선생은 1934년 개성 전기회사에 입사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삶을 개척해 나간다. 해방 후 양말공장을 인수하여 크게 돈을 벌게 된 선생은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자 그간 미뤄 두었던 배움의 길을 적극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지적 욕구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던 선생은 1947년 비판신문을 발행하고, 1948년에는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요인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을 위한 김구 주석의 평양 방문’에 기자의 신분으로 동행하기도 하였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29세부터 사업에 대한 경영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본인은 한학을 바탕으로 한 서예와 전각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여러 고서들을 수집했다. 특히 다양한 자전들을 구입하여 갑골문에서 시작된 한자의 변천과정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고, 이러한 집요한 탐구는 서예와 전각에 천착하며 그의 작품세계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에 이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작업해 낸 일자서, 대자서들은 우석이 평생에 걸쳐 공부한 글씨의 집약이었다.
갑골문에서 시작하여 전예해행초篆隷楷行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자의 자형들을 자신이 해석한 글자의 의미에 따라 배치하고 끌어다 쓴 우석의 글씨는 그만의 독자성이 있다. 무수한 선현들의 좋은 글귀를 임모臨摹하는 것에 그쳐있던 대부분의 서단과는 달리 홀로 자전을 수없이 읽고 독학하며 글자 하나에 담긴 의미를 곱씹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써내려간 우석의 글씨는 파격이자 독보獨步였다.
우석 서書가 가진 남다른 독자성은 앞에서 열거한 그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력에서 보듯 우석은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아니라 사회적 문제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삶의 현장에서 현실과 부딪히며 경제적 부를 이뤄낸 우석은 온몸으로 세상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머리로만 아는 사상가에 그치지 않았다. 생각과 이상은 현실에 적용되어야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비판신문과 고미술시보(1961년 창간)를 발간하고 발로 뛰는 기자로, 주필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석의 서書는 사상의 나열이 아니다. '인생재근人生在勤', '근무가보勤無價寶', '자강불식自強不息' 등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삶 그자체 였던 것이다. 우석은 눈을 뜨면 먹을 갈고 글씨를 쓰거나, 돌을 갈아 전각도를 잡고 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여 하루를 마칠 때까지 매진했다고 한다. 그 성실함이 지금의 이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게 했을 것이다.
우석은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자 했던 선생은 새로운 것을 취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서예가이면서 한지와 먹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나무에 페인트 작업을 하거나 먹 작업 위에 컬러를 입히고, 뿌리는 작업은 그 당시 미술 사조를 이해하고 자신의 작업에 실험했음을 보게 한다. 전각가로서는 돌과 나무만이 아니라 선물상자로 쓰인 나무판을 이용하여 각을 하는 등 실용주의적 면모도 보인다. 선생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글씨 ‘극기克己’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정신鼎新’의 단면이라 생각된다.
우석의 글씨는 한학자 집안의 맥을 잇는 '선비로서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문인화가 사의寫意를 중시하여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사물의 진수를 표현하는 것을 높이쳤던 것처럼, 선생은 끊임없이 서도를 연마하여 필력을 갖춘 후에 쓰고자 하는 글씨를 마음 속에서 완전히 해석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을 갖추기 위해 정진한 그였기에 ‘흉중성죽胸中成竹’으로 작품에 담아낼 수 있었다. 필력이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그림에 기교가 나타나지 않도록 치졸稚拙한 맛을 살려 그림으로 천진天眞함을 강조한 사대부들의 문인화처럼 우석은 한자에 담긴 정수만을 살려 단순한 형태로 담백하게 글씨를 썼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말했듯 '천연天然의 묘妙와 진솔眞率의 미美'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구석 선비들과는 다르게 앞에서도 언급했듯 우석은 현실에 토대를 두었다. 사의寫意를 추구하고 형사形似를 멀리한 사대부들과 달리 우석은 사의와 함께 형사도 갖춘 학인이었다. 글자에 담긴 뜻과 함께 글자의 원형도 짚어냈기 때문이다. '우석의 '그림글씨' 내지는 '글씨그림'에는 추상과 구상이 따로 없이 해독된다'고 말한 이동국(전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현 경기도박물관장)의 평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금번 전시를 통해 우석뮤지엄은 설립 초창기부터 우석의 서書를 살피고 해독해 온 권진숙 한학자을 모시고 우석 글씨에 담긴 정신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우석의 글씨를 오래 보아온 그는 우석이 글씨에 담고자 했던, 자기 스스로에게 고誥할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고하는 도道를 읽어내고 있다. 탄탄한 한학적 지식과 함께, 오랜시간 우석의 글씨를 해독하며 마음에 새긴 권 한학자의 깊이있는 해설이 우석의 글씨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전시 중에는 그의 강의도 예정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와서 우석 글씨에 담긴 인생의 도를 마음에 새기고, 삶에 적용하게 되기를 바란다. 특히나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대에는 마음을 지킬 뿐 아니라 마음에 새긴 정신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깨어있는 지성들이 더욱 필요하기에, 우석의 금번 전시가 더욱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전시 작품
道 도_68x64cm_한지에 먹
道 도_68x64cm_한지에 먹
道 도_2.1X4.5X3.5_돌에 각
道 도_2.1X4.5X3.5_돌에 각
唯心 유심_63x125cm_한지에 먹
唯心 유심_63x125cm_한지에 먹
無 무_95×48cm_한지에 먹
無 무_95×48cm_한지에 먹
無爲 무위_63x64cm_한지에 먹
無爲 무위_63x64cm_한지에 먹
仁義 인의_63×125cm_한지에 먹
仁義 인의_63×125cm_한지에 먹
君子自强不息 군자자강불식_24x100cm_한지에 먹
君子自强不息 군자자강불식_24x100cm_한지에 먹
自强不息 자강불식_9x9x11cm_돌에 각
自强不息 자강불식_9x9x11cm_돌에 각
自强不息 자강불식_6x6x4.2cm_돌에 각
自强不息 자강불식_6x6x4.2cm_돌에 각
自强 자강_3.5x9x7.5cm_돌에 각
自强 자강_3.5x9x7.5cm_돌에 각
己百之 기백지_3.7X5X5.7cm_돌에 각
己百之 기백지_3.7X5X5.7cm_돌에 각
克己 극기_63×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克己 극기_63×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克己 극기_63×125cm_한지에 먹
克己 극기_63×125cm_한지에 먹
寬大 관대_120.5×123cm_한지에 먹
寬大 관대_120.5×123cm_한지에 먹
人生在勤 인생재근_63x125cm_한지에 먹
人生在勤 인생재근_63x125cm_한지에 먹
勤無價寶 근무가보_63x125cm_한지에 먹
勤無價寶 근무가보_63x125cm_한지에 먹
盡力 진력_63x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盡力 진력_63x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千里行始于足下 천리행시우족하_63x125cm_한지에 먹
千里行始于足下 천리행시우족하_63x125cm_한지에 먹
千里行始於足下 천리행시어족하_45x70cm_한지에 먹
千里行始於足下 천리행시어족하_45x70cm_한지에 먹
千里之行始爲足下 천리지행시위족하_12.5x12.5x20cm_돌에 각
千里之行始爲足下 천리지행시위족하_12.5x12.5x20cm_돌에 각
行百里者半九十 행백리자반구십_63x125cm_한지에 먹
行百里者半九十 행백리자반구십_63x125cm_한지에 먹
日日新又日新 일일신우일신_63x125cm_1990
日日新又日新 일일신우일신_63x125cm_1990
斬新참신_63x125cm_한지에 먹
斬新참신_63x125cm_한지에 먹
복, 오복_123×34cm_한지에 먹
복, 오복_123×34cm_한지에 먹
受天之福 수천지복_63x125cm_한지에 먹
受天之福 수천지복_63x125cm_한지에 먹
受天之福 수천지복_183x133cm_나무에 페인트
受天之福 수천지복_183x133cm_나무에 페인트
盛福 성복_63x125cm_한지에 먹
盛福 성복_63x125cm_한지에 먹
介福 개복_63x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介福 개복_63x125cm_한지에 먹과 채색
龜 귀_120×122cm_한지에 먹
龜 귀_120×122cm_한지에 먹
龜龍壽 귀룡수_65×114cm_한지에 먹
龜龍壽 귀룡수_65×114cm_한지에 먹
잠룡潛龍에서 비룡飛龍으로_63x125cm_한지에 먹
잠룡潛龍에서 비룡飛龍으로_63x125cm_한지에 먹
飛龍 비룡_370x60cm_한지에 먹
飛龍 비룡_370x60cm_한지에 먹
人中龍 인중용_63x125cm_한지에 먹
人中龍 인중용_63x125cm_한지에 먹
<기획글>
내가 보고 느낀 우석又石 선생의 글씨
권진숙權振肅 | 한문학자
글씨를 전공한 서예가나 글씨를 논평하는 평론가도 아니면서 남의 글씨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우석又石 선생의 글씨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지금의 내가 그에 해당할 수도 있다. 다만 한문학자로서 우석의 서예를 정리한 <우석又石 최규명崔圭明 선생先生 서집書集>(2012, 태학원)과 전각을 집대성한 <취석위보取石爲寶, 돌을 취하여 보배를 짓다>(2014, 열린책들)의 발간에 해설자로 참여하며 수십년 간 선생의 글씨를 접해왔기에 누구보다 우석의 글씨를 오래 보아왔다할 수는 있겠다. 우석 선생의 글씨를 해독하고 정리하며 작품을 대하는 시간이 쌓이다보니 선생의 글씨가 가진 남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언젠가 그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다. 글씨를 접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지던 인상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고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 전시를 계기로 우석 글씨가 준 강한 인상과 생각들을 간략히 나누어 보고자 한다.
작품作品을 위한 글씨가 아니고, 도道를 닦기 위해 글씨를 쓰다
우석 선생은 서예가 본업이 아니었다. 예술인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권에서 시행하는 미술대전 또는 서예 대전 같은 관문을 거친 것도 아니고, 글씨로 남에게 돋보이거나 명성을 얻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평생동안 글씨(전각 포함)에 대한 열정은 본업으로 하는 자에 못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석 선생에게 글씨란 잘 쓰고 못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올바른 길道을 가기修行 위한 마음다짐의 일환인 듯하다. 사실 옛날의 선비들은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수양에 필요하고 유익한 내용을 글로 써서 수시로 보면서 잊지않고 실천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우석 선생이 쓰신 특히 큰 작품들을 보면 대개가 인생에 귀감이 되는 말들이다. 어려운 표현이 아니고 귀에 익고 눈으로 보아온 내용들이다. 노자나 공자를 비롯하여 제자백가들의 글 중에서 인생에 필요하고 절실한 말들을 뽑아서 쓰고, 이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힘쓰신 것이다. 우석 선생의글싸는 서예書藝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도道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글씨였던 것이다.
갑골문甲骨文에 조예造詣가 깊다
우석 선생이 쓴 글씨를 보면 갑골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큰 작품들 대부분이 갑골문이다. 갑골문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가장 오래된 한자의 형태이다. 이것은 문자의 원형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글자의 기원이나 제작원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기초)적인 자료이다. 따라서 갑골문에 조예가 깊다는 것은 문자에 대한 기본 지식이 튼튼하다는 의미가 된다. 학문이나 예술이나 그 외 모든 것들이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을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갑골문에 대한 이해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자료가 빈약하고 전공자도 드물어서 일반인은 거의 이해를 못하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한문학을 하는 경우라도 갑골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필자가 선생의 작품 사진을 가지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한문학자 몇 분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는데 모두 모르시고 '이런 것은 직접 쓴 사람이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갑골문에 대한 이해가 빈약한 환경에서 우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간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학습을 하였으니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할만하다. 선생이 소장하였던 자료들은 지금도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고 또 갑골문 글씨의 운필이 거침없이 세련됨을 미루어 볼 때 깊은 학습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겠다.
질박하고 꾸밈이 없다
우석의 글씨를 보면 첫눈에 느껴지는 것이 글씨가 질박質樸;質朴하고 외형적인 꾸밈이 없다는 점이다. <논어> 옹야雍也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질(質 본바탕)이 문(文 외형적 꾸밈)을 이기면 야(野 촌스러움, 거침)하고, 문文이 질質을 이기면 사(史 세련됨)하니, 문과 질이 잘 조화되어야 군자라 할 수 있다(子曰자왈 質勝文則野질승문즉야 文勝質則史문승질즉사 文質彬彬然後문질빈빈연후 君子군자)"라고 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질質은 본질, 바탕, 정신, 내용... 등을 말하고, 문文은 의식儀式, 형식, 외면 등을 지칭한다. 인간은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행위가 일치되어야 온전한 인격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잘 조화되기란 쉽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양시楊時가 말하기를 겉으로만 세련된 것보다는 차라리 촌스럽더라도 속으로 진실됨이 낫다고 했다.
글씨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는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글씨는 기본적으로 획이 중요하다. 한획 한획이 합쳐져서 글자가 된다. 과거 서당에서 훈장이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칠때 '글씨를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먼저 골격이 되는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을 튼튼하게 잘 구성해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곧 무너진다'하고 하는 말을 들었다.
우석 선생의 글씨를 한 글자씩 따져 보면 획을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흔적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글자의 획을 목재로 말한다면 투박하고 튼튼함은 있지만 예쁘고 아름다움은 적고, 거칠고 강건함은 있지만 매끈하고 세련됨은 적은 편이다. 이처럼 선생의 글씨는 외형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본질적인 질박함이 강하다고 하겠다.
창신創新의 변화를 시도하다
창신이란 새롭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무조건 만들어 낸다는 말이 아니고, 그 원리와 원칙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이치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신이란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 것을 모범으로 해서 새롭게 창조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는 옛 것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글씨도 마찬가지이다. 글자를 새롭게 창조변화를 하려면 그 글자의 유래나 만들어진 원리를 이해하여야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석은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갑골문에 조예가 깊다는 점이다. 갑골문은 문자의 기원이나 제작 원리를 이해하는 최고의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 글씨에서 창신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의 예로 '鼎新정신', '千里行 始于足下천리행시우족하', '介福개복', '抱遠포원', '信신'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중에서 '정신'이란 작품은 솥鼎 안에 신新자가 들어 있다. 필자도 처음에는 이것을 솥정鼎 자로만 이해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뭔가 석연치 못했는데 후에 갑골문에서 '신新' 자를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솥 안에 신자를 넣는다는 것은 주역 정鼎 괘에 솥에 물건을 넣고 삶아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을 모르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변화인 것이다. 솥정鼎자는 원래 솥의 모양을 본떠서 갑골문에는 텅 빈 솥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솥 안이 비었으니 물건을 넣어 새로 만든다는 뜻으로 안에 新신 자를 쓴 것이다. 이처럼 우석은 글자의 원리를 이해하고 변화를 시도했음을 볼 수 있다.
획이 힘차고 졸기가 없다
선생의 작품사진을 가지고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고향에 계시는 학문학자이며 서예가인 고 석계石溪 김태균金台均 선생을 뵌 적이 있다. 작품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보시면서 먼저 하시는 말씀이 "글씨가 아주 힘이 좋다"였다. 이 말씀처럼 우석의 글씨가 졸기 없이 시원스럽고 필획에 힘이 넘친다는 느낌은 보는 이마다 공통적이다. 그 이유는 글씨를 쓸 때에 작품을 만들겠다고 하는 욕심이 없이 편안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썼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잘 써야 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이미 마음이 긴장하고 졸기가 들어서 글씨가 궁색해진다. 운필이 망설여지고 필력이 떨어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생은 작품이 목적이 아니고 도를 담는 그릇으로 생각하시고 글씨를 쓰셨기 때문에 거침없이 활달하고 힘이 넘치는 글씨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와 관계되는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과거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시대에 한약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약처방을 여러 장 써서 중국 가는 인편에 부탁하여 약재를 사오게 했다. 현지에 도착하여 처방전을 보이고 약재를 사 가지고 나오려는데 약재상 주인이 부르면서 그 약처방전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 이유는 글씨가 좋아서 사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사 온 약재를 주면서 말하기를 다음에는 글씨를 좀 더 잘 쓰면 글씨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여러 장의 처방전을 써서 다음번 갈 때에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을 갔다와서 하는 말이 처방전을 팔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전에 샀던 약재상 주인이 이번 처방전을 보고는 글씨가 졸기가 들고 힘이 없어서 전에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씨도 욕심이 앞서면 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겠다.
자신만의 서체書體를 이루다
우석은 어느 특정 인물의 글씨를 모방하거나 특정 서체를 본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방식대로 써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서체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글씨를 쓰는 마음과 목적이 바뀌지않고 한결 같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글씨에 일관성이 떨어지고 불안정한 변화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작품에는 그런 변화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옛날 유명한 서체로서 왕희지 체니 구양순 체니 한석봉 체니 하는 것도 처음부터 그러한 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본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본인만의 글씨의 특색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우석선생의 글씨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우석만의 특색있는 글씨로서 가히 '우석체又石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으로 우석의 글씨에 대해 스스로 보고 느낀 몇가지 점들을 적어보았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글씨가 본업이 아니면서 평생동안 붓을 놓지 않고 계속해 왔음은 본업으로 하는 것 이상의 뜻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평생 도道를 닦는 정신으로 글씨의 작품성, 예술성 같은 외형적인 면보다는 글자에 담긴 뜻을 중시하여 잘 되고 못되는 것은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글씨로 초지일관할 수 있었다. 또 뛰어난 작품을 만들거나 과시하려는 욕심이 없었기에 자신의 글씨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서체를 이룬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고대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을 하여 문자의 원형과 그 제작원리에 해박하였다. 그래서 글씨가 파격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따져 보면 글자의 제작원리에 위배되지 않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글씨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이란 외형적인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그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내면에 담긴 뜻을 전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석의 작품 전시를 예술적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인생의 올바른 도道를 배우고 느낀다는 철학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진정한 가치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