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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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최규명의 서화 〈高麗〉 山은 무쇠 작대기, 虹(무지개)은 통일의 다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고려(高麗), 188x243cm, 캔버스에 아크릴, 1990년대 중반 제작>

 

 우석(又石) 최규명(崔圭明·1919~ 199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서예·전각 특별전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6월 7일부터 한 달간 관객을 맞는다. 우석의 서(書)를 보노라면 ‘서예가 과연 미술인가’라는 의구심을 떨치게 한다. 그의 글씨는 미술의 한 영역을 넘어 새로운 장르에 가깝다. 조형(이미지)과 내용(텍스트)을 함축한 일자서(一字書), 대자서(大字書)를 통해 질삽(疾澁·매끄러운 획과 까칠한 획)의 미학(美學)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의 글씨는 필획(筆劃) 자체가 선(線·line)이 아니라 입체(立體·stroke)다. 추상(抽象) 언어에 가깝고 작가의 무의식 세계까지 닿아 있다.

  우석의 작품 〈고려(高麗)〉를 보자. 상형문자 같은 느낌을 준다. ‘여(麗)’의 원형이랄 수 있는 ‘사슴 록(鹿)’과 ‘높을 고(高)’가 연결돼 마치 사슴이 네 발로 선 듯하다.


우석 최규명의 생전 모습이다.

그 연결이 자연스러워 어떤 기운의 흐름이 전달된다. 글의 하체가 튼실하다고 할까. 하체만 보면 사슴이 아니라 사자라고 해도 믿겠다. 그 밑에 고딕체로 적힌 영문 ‘KOREA’도 자연스럽다. 〈고려〉의 글씨 속에는 현재 남북이 처한 분단이나 이념의 갈등 같은 아귀적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된 미래의 ‘코리아’처럼 역동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서예계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 “한시(漢詩)에는 소년 천재가 있어도 서예에는 천재가 없다”는 말이 있다. “농사꾼처럼 부지런히 전·예·해·행·초서의 5체를 매일 써야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서예야말로 가장 정직한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최규명은 황해도 개성이 고향이다. 그의 아버지 석전(石田) 최치훈(崔致勳)은 당대 한학자인 정인보(鄭寅普)·변영로(卞榮魯)·김석준(金錫俊) 등과 동학한 인물이다. 우석은 개성 상인의 후예답게 성실·근면·절제로 정비소, 양조장, 극장사업, 농약공장 등의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그러나 경영 이외의 시간을 서예나 전각 활동에 쏟아부었다. 언론에 관심이 많아 해방 직후 《비판신문》을 창간하고, 1960년대 초에는 《고미술 시보》를 창간해 덕수궁 돌담을 허물어 철책으로 만드는 문화적 무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산(山)은 무쇠 작대기, 무지개(虹)는 통일의 다리

〈산(山)〉, 63×125cm, 지본수묵, 1990년대 중반 제작.


이번에는 우석의 〈산〉을 오래 바라보았다. 높고 고고하면서도 빽빽한 숲을 연상케 한다. 음양(陰陽)으로 치면 온통 양 기운으로 가득하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저 산속에 들면 아무도 범접 못할 것 같다. 산이 요지부동의 무쇠 작대기 같다고 할까. 저 산처럼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의 〈산〉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다. 산이 너무 높아 보인다. 여백이 없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우석은 피안의 세계를 그리려 한 것일까.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複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풀이하면 산과 물이 첩첩하여 길이 없는가 했는데, 산골 속에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또 하나의 마을이 있더라는 뜻이다. 아무리 산이 높고 골이 깊어도 사람은 똬리를 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산홍산(山虹山)〉, 700×100cm, 광목에 아크릴, 1980년대 중반 제작.

〈산홍산(山虹山)〉의 첫 느낌은 장난스럽다. 두 산 가운데 ‘홍’자는 ‘무지개 홍(虹)’이다.


우선 두 산은 봉분 같기도 하고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세 골짜기로 나뉜, 엎딘 산은 융통성이 없이 보인다. 삐쭉한 것이 화난 모습일까. 둥근 봉우리도 제각각이어서 산만하다. 이 양쪽 산에 무지개가 이어져 있다.


  무지개는 두 겹이다. 튼실하다. 붓의 박력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문인화(文人畵)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경쾌하며 섬세하고 정교한 아름다움과 정반대다. 〈산홍산〉은 거칠고 질박하며 대담하고 단순한 서화다. 여기서 두 산은 남북한을 상징하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가리킨다. 남북통일을 열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사 원문>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0710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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