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knot


 권여현, 김형길, 서용인, 송은영, 이유미, 전찬훈, 정수경, 지원진

전시기간 : 2024. 8. 24 ~ 9. 13

신촌로 129, 아트레온 B1,2 

작가 노트


  

권여현

낯선 숲은 유토피아가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결코 만날 수 없는 숲이며,  두 세가지의 다른 공간이 조합된 가상의 장소입니다.  공익과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가치때문에 희생되고, 생략되고, 반올림되지 못한 채, 소멸되어야 했던 것들이 저장된 곳입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장소에 대한 감각의 비자발적이고 하위문화를 대면하는 장소입니다. 일탈자의 행위는 이상하고 엉뚱하고 찌질하고 이유없고 반항적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리비도를 타고 지킴이의 감시를 피하려고 가면을 쓰고 꿈속에서 소망을 충족하듯이, 일탈자는 밈의 전달체계에 올라타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위장하여 현실의 규범을 속이려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억압된 욕망과 감각을 대신 표현해주는 우리시대의 히피적 기호입니다.

내가 중시여기는 회화적 화두는 붓질의 빠름과 얇은 막을 형성하는 스트로크와 맑은 색채입니다. 여러번 묘사하여 만들어낼 형태를 한두 번의 터치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점적인 표현 방법입니다. 작가의 역량이 간결하게 녹아 있을 때 혹은 또 그것이 사회적인 미적요구에 부합하여 현대적인 조형성을 갖고 있을 때 관람객은 그 작품을 보고 살아 움직임을 느끼게 됩니다. 기운생동의 묘법인 것입니다. 색채의 선택은 형태와 무관합니다. 단지 그것들은 색채가 칠해질 영역에 따라서  조화롭게 구사 될 뿐입니다. 노랑머리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서양인이 아니며 흰 피부와 구리색 피부 역시 인종을 표현하는 색채가 전혀 아닙니다. 그저 사물의 층위를 표현하는 조형장치일 뿐입니다. 특정인이나 특정 상황을 추측하는 것 역시 나의 맥거핀 세계일 수 있습니다. 의미와 형태와 색채의 따로 구별되지않는 무간지경처럼,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꿈과 현실의 끝자락에서 꿈꾸는 잔몽의 세계처럼, 내 그림속의 인물들은 낯선숲에서는 감각의 해방과 자유를 갈구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 절실한 신호를 가벼운 웃음으로 넘기지 말고 내게 다가와서 깨워달라고 손짓합니다.


김형길

나는 동시대에 타자로서의 환영적인 삶의 모습과 유무형으로 다양하게 연결되어져 있는 관계성, 파동과 타력에 흥미를 가진다. 그래서 내 작업은 삶 속에서 희노애락과 관습으로 다양하게 얽혀져 있는 인간이나, 고도로 발전한 인류문명과 충돌하는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생명태를 소재로 한다. 그리고 무수한  '존재와 보이지 않는 생명성의 타력'을 '연결(이음)의 놀이' 처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용인

"창가에 옥수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시간이 흐른다.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형태들이 춤을 춘다.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무엇이 서로 반응하고 그 속에서 몸이 된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감각적 차이를 이루고 스스로의 형태를 빚어 낸다.

어쩌면 무기력하게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무심하게 주어진 상황에 자신을 맡긴다.

운명, 피할 수도 주저할 수도 없이 이미 그곳에 서 있다. 

끝없이 반복하고 반복한다.

저항하는 것이다." 


무의미의 실존적 상황에서 의미를 끌어올리는 존재로서 나는 나의 실존적 환영을 설계하고 있다. 이 의미와 무의미의 변증법적 운동은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반복적 반응은 나의 주체적 상징들로 부터 나를 벗어나게 하고 나를 감각적 오브제로 보이게 한다. 그 속에서 더이상 해석이 불필요하며 의미의 체계는 상징적 형태로만 나타난다.



송은영

나는 공간의 안과 밖, 앞과 뒤,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환영 등 대비되는 요소를 한 화면에 병치함으로써 비정형적인 풍경을 제시한다. 공간 속의 사물이 원근법의 규칙을 깨면서 서로의 경계와 공간을 침범하는 장면은 실재하는 것과 환영적인 것(일루전)을 혼합하면서 시각적인 혼란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것을 ‘Invaded’ series라고 부르는데, 이 회화 프로젝트 시리즈를 15년 넘게 이어오면서 이것들이 그냥 ‘나의 페인팅’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작업이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공간적이면서 평면적이며, 뒤(밖)에 있으면서 앞(안)에 있고, 명확하면서 모호하고, 전체적이면서 부분적이고, 단순하면서 이중적이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낯설고 반의적인 요소들이 규정되지 않고 그 안에서 같이 공존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비확정적 풍경(Uncertain Landscape)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유미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달을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바다라고 불리는 달의 바다가 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그저 황폐한 모래 구덩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한 '달의 바다'는 있지도 않다. 무지로 인한 착각인 것이다. 그저 멀리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상상력과 낭만적인 해석이다.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달려왔으나 황폐한 현무암을 만나는 순간 현실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멀리서 보면 모두 다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현실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 삶의 무게는 모두에게 결코 가볍지 않다. 남들의 인생은 행복해 보이지만 진실을 알고 보면 인생은 누구에게나 유쾌하지 않고 구질구질 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모르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심히 넘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에 진실이 크게 보였던 것인가. (작가 노트 중에서)


그동안 본인의 작업에서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서 보여주는 온갖 감정들이 왜 그래야 되는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기에 겪어야 되는 즐겁지 않은 삶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리고 제주로 오게 되면서 바람이 부는 대로 자라난 나무, 변화무쌍한 하늘의 구름,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비취색 바다, 화산 분화구였다는 크고 작은 오름,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기암괴석, 무심한 듯 쌓여진 돌담, 빨랫줄에 걸려 있는 해녀들의 잠수복, 바닷가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작업적인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라 말하지 못한 상처, 잊혀 지지 않는 슬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아픔, 알지 못했던, 잊고 있던 숨겨진 이야기... 제주의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내 마음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 집안의 가족사이면서 비극적인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업했던 작품들이다. 제주에서 만났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감과 나의 가족사에 대한 은유적인 내용의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삶을 지지하는 힘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DNA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 할 영겁의 시간의 축적과 함께 삶과 죽음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왔다.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를 보호해주며, 내 안에 있는 오래된 미래이며 존재의 근원이다.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을 얘기하고 있다. 이걸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 또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묻고 싶다.


전찬훈

전찬훈 작가는 유리봉을 이용해 빛의 굴절현상이 만들어내는 색과 형상의 변위를 시각화하며 독창적인 회화를 선보이는 작가이다. 그는 현실과 비현실, 실체와 지각 사이에서 겪는 내적 혼란의 부조리한 감정을 투명한 유리봉으로 이미지를 굴절 또는 확산시키며 삶의 지속성에 대한 작가의식의 놀이로 풀어낸다. 작가에게 빛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작용의 매체이면서도 심상의 통찰과 함께 자기인식의 인문적인 발상이며 미학적 이데아를 향한 창의적 주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유리봉으로 병렬된 셀(cell)의 집합체는 작가만의 작품세계를 바라보는 창(窓)으로써 감상의 폭을 확대하며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조형미를 제공한다(‘전찬훈 비평’ 중에서).  - 김재덕


디지털 작업을 한 그림을 투명하게 비치는 유리봉은 빛을 반사하며 이미지를 확대하기도 하고 둥그런 모양 탓에 가장자리는 볼록렌즈처럼 이미지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을 굴절시키며 명채도가 변하고 모양도 변하게 하는 성질이 있어, 라인 작업을 할 때면 유리봉의 직경 4~6mm 단위에 맞는 치밀한 계획을 필요로 하지만 때론 예기치 못했던 효과와 결과를 가져와 연이어 나를 실험에 빠져들게 했다. 이런 새로운 빛의 현상에 대한 일련의 실험과 창안, 일탈의 우연한 결과, 이 모두 새로운 미적 의식과 체험의 창조적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창작 과정을 Fiat Lux! 라 이름 붙였다. - 전찬훈


정수경

정수경의 그림에서 나무는 카오스의 고통 속에서 빛을 향해 위로 나아가는 존재다. 아직 질서는 요원하나 생명력의 분출과 초록의 소리는 자신만의 불규칙한 반복으로 혼돈을 벗어난다. 일견 추상표현주의의 폭발적 상처가 자리를 잡는 것도 나무의 줄기, 그리고 나무의 초록이다.

정수경의 나무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자연은 평화의 산물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드라마이며 끊임없이 펼쳐지는 투쟁의 장(場)이다. 정수경의 나무들은 그 양립불가능한 이중적인 삶을 담았다. 상흔처럼 떨어진 물감들에서 폭발하는 감정의 분출이 드러난다. 

드리핑(dripping)으로 빗물처럼, 눈물처럼, 피처럼, 물감의 흔적들은 캔버스를 2차원 회화의 평평한 사유공간으로 만들기도, 눈물이 잎이 되어 초록의 물감이 층층이 쌓여 나무들을 이루는 숲의 3차원 깊이로 채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물감의 자국들은 캔버스라는 커다란 악보 위에 저마다의 소리를 남긴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초록’이라는 단어가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했듯이, 정수경의 초록은 매번 움직이고 변화하는 ‘동사’이다. 작가가 인지하는 색 중에서 가장 버라이어티하다는 초록은 그래서 끊임없이 변주한다. 그리고 그 초록의 소리는 하나하나의 음이 아닌 공간을 채우고 자연의 시간을 점유하는 궤적을 이룬다(‘초록의 소리, 번져나가다’ 중에서 일부 발췌). - 전혜정(미술비평)


드리핑은 물감과 캔버스가 만날 때 물감의 양과 밀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시각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소리는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가라앉아 있던 온몸의 감각들을 깨우기 시작한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본다. - 정수경




지원진

나는 내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일정 수준의 자세를 요구한다. 일반적인 관객의 자세는 나의 그림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아주 최소한의 조형 언어만을 사용하였기에 관람객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정보의 최소화는, 그것을 읽어 내는 관객의 입장에서 아주 곤혹스럽고 때로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관람자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를 먼저 꺼낸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진 그림이 되길 바랬다. 그만큼 간절하게 나를 지워야만 이야기는 시작 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관계를, 우주를 이야기한다면 결국 나의 이야기로 끝나고 말 뿐이다. 여기서 화자인 나를 지우려는 작업은 결국 모순이 생기겠지만 내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최소한의 이야기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종이와 먹 그리고 붓, 간소한 재료를 통해 무심코 흘린 점 모양의 단순한 씨앗, 돌멩이, 물방울 등 유사 형태의 모양이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이 점의 형태를 관찰하거나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당신을 바라 보고자 한다. 당신은 관객이 아니고 대상이 되어야 한다.
씨앗, 돌멩이, 물방울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 이것을 느끼는 것이 이 작업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상상력이 풍부했던 옛 선인들은 이것을 심안(마음의 눈)이라 불렀고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눈으로 보려고만 하지 말고 눈을 감고 그림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출발하는 마음의 눈은 곧 물아일체 즉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무위이화의 세계, 화엄의 세계를 경험하는 첫걸음이다.
나를 죽이는 일은 일체의 모든 번잡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색채와 구도의 조형적 변화는 이 땅의 살아가는 인간세 이야기이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최소한의 요소만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더 이상 뺄게 없는 최소의 세계이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는 수묵의 정신은 물성이나 기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사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속해있다.
많은 관객들이 정보의 단순성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단순함은 그냥 묻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양파의 껍질처럼 얇은 막이 쌓여서 양파를 형성 하듯 단순함의 두께는 비록 한눈 거리일 지라도 이 단순함이 쌓여서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우주를 만들고 있다.
오래전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수챗구멍에 걸린 밥알을 보며 안타 까와 했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밥알의 일대기가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농부의 손에서, 작년에 모아둔 종자로 간택되어, 정성스럽게 키워져, 들판의 모내기에서 힘껏 자라 탈곡 되어, 나의 밥상까지 왔을 밥알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여정이 허망하게 되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느껴졌고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여 슬퍼 마라. 나는 그냥 존재할 뿐 네가 나를 먹어 너와 하나가 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있었고, 너도 나와 같은 한 낱의 존재이며 모두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자네가 뭔데 나를 보며 슬퍼하는가?”

어떠한 언어로도 씨앗, 돌멩이, 물방울이 하고자 했던 말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소박하고 평온하고 고요하게, 자신에 넘쳐 거기에 있었다. 숱한 사물들 가운데 하나의 사물처럼, 너무도 확연한 가시적 물질에 내재하는 불가시적 정신 존재를 표현하며 그렇게 있었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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